마테라치 “지단과 충돌? 아직도 그 이야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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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라치 “지단과 충돌? 아직도 그 이야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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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라치 “지단과 충돌? 아직도 그 이야기인가?”

마테라치 “지단과 충돌? 아직도 그 이야기인가?”


축구화를 벗고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는 ‘그때 그 스타’를 만납니다. <편집자 주>


이탈리아의 월드컵 우승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수비수였다. 그렇지만 마르코 마테라치에게 지네딘 지단을 언급할 때는 용기가 필요하다.


1998-99시즌 에버턴에서 1년 뛰었는데, 무엇을 배웠나?

글쎄, 새로운 나라에서 이방인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됐다. 이탈리아에 오는 외국인 선수들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경험해보니 좋았다. 도움이 됐다.


그 시즌에 세 차례 퇴장 당했다. 수비수로 깨달은 바가 있었나?

항상 왜 레드카드가 등장하는지 평가해야 한다. 대런 허커비를 상대했던 게 생각난다. 광고판 옆에서 울고 있는 내 사진과 나를 위로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 생각에 그 레드카드는 완전히 오판이었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 어쩌는지 알지 않나. 레드는 레드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매트릭스’라는 별명은 어떻게 생겼나?

인테르 시절이었다. 클럽 채널에서 팬들을 대상으로 별명을 고르는 설문을 진행했다. 그래서 매트릭스가 됐다! 이제 어디에서든 통한다. 나도 그걸 좋아한다.


2001년 이탈리아대표팀에 데뷔했다. 아주리 일원으로 뛴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영국으로 간 선수라면, 나라를 대표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당시에는 세리에A에서 뛰지 않으면 이탈리아 대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날 복귀시킨 게 무엇이었을지 알겠나. ‘아주리’를 향한 꿈이었다.



2006월드컵에는 어떤 기대감이 있었나?

2002월드컵 이후 마르첼로 리피 감독이 만든 팀이었다. 더 좋은 팀이었지만 여러 이유로 이기지 못하는 때였다. 16강에서 주심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상황을 수습하고, 2년 간 마르첼로가 우리 자신감을 키웠다. 월드컵이 시작하면 이탈리아는 언제나 우승을 목표로 출발한다.


당시 칼치오폴리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대표 선수들을 자극시켰나?

우린 모두 함께였다. 다른 색깔은 없었다. 오직 파랑이었다. 밀란이나 인테르, 유벤투스 같은 구분이 아니라 오직 ‘우리’였다. 11월 네덜란드 원정에서 승리했을 때도, 3월 독일에 4-1로 승리할 때도 칼치오폴리는 우리를 흔들지 못했다. 이 승리들은 팀이 이미 본선에 있다는 증거였다. 사람들이 칼치오폴리 덕이라고 한대도 개의치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본선 첫 두 경기에서 벤치를 지켰다. 이후 알레산드로 네스타가 부상 당했다. 전력 외로 출발하는 게 힘들었나?

그렇지 않았다. 내 역할과 나에 대한 리피의 평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래도 체코공화국전에서 워밍업 할 때는 갈망과 두려움이 공존했다. 두려움은 2002월드컵에서도 한 경기만 뛰었기 때문인데, 크로아티아가 골을 넣으면서 비난의 화살이 내게 몰렸다. 유로2004에서도 우린 좋지 않았다. 이탈리아 유니폼의 무게는 클럽보다 무겁다. 클럽에서 50경기를 뛰고 한두 경기 나쁘면 사람들이 눈감아준다. 대표팀에서는 당신의 움직임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다시 체코를 마주했을 때, 나는 내 우상이자 전설, 그리고 역대 최고의 수비수를 대체하고 있었다.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골을 넣기까지 9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나를 도발한 파벨 네드베드에게 좋은 태클을 시도했고, 그 경기 최우수선수에도 선정됐다.


호주와 16강전 0-0 상황에서 퇴장했다. 파비오 그로소가 막판 페널티킥을 얻어냈고…

퇴장당한 선수들은 도핑 테스트를 받아야 했다. 나도 대기 중이었다. 프란체스코 토티가 페널티 지점에 섰던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2, 3분이었을 거다. 월드컵 우승에 내가 한몫을 했음에도 이탈리아 사람들은 나에 관해 논쟁한다. 만약 내 퇴장으로 우리가 졌다면, 사람들은 날 희생양으로 삼았을 거다. ‘그가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면서 말이다. 나는 토티가 득점하길 기도했다. 그의 골로 비난이 모두 사라졌다.


개최국 독일과 4강전에서 복귀했는데?

그 경기가 진짜 결승 같았다. 그들의 요새 같은 경기장으로 가고 있었다. 우리에 적대감을 보이는 65,000명의 팬들이 들어찼다. 그들이 한번도 패한 적 없는 경기장이었다. 하지만 독일은 모든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선수들이 필드로 들어설 때 그들의 얼굴은 유니폼처럼 하얗게 질려있었다. 우린 흥분했다. 피와 땀을 흘릴 준비가 됐다. 델 피에로, 질라르디노, 토니, 토티, 피를로 모두 공격했고, 추가 시간에는 크로스바와 포스트를 때렸다. 그로소가 결승골을 넣고 우린 그들을 압박했다


결승행을 언제 자신했나? 그로소의 골이 터진 119분? 아니면 곧바로 델 피에로가 골을 추가했을 때?

델 피에로가 득점했을 때. 그 골이 나온 후 나는 주심을 껴안았다! 나는 독일이 빨리 경기를 재개하기 원치 않았다. 모두가 그로소와 포옹했고, 알렉스를 향해 달려갔다. 독일이 곧장 경기를 재개할까 걱정했다. 나는 탈진한 상태였다. 주심과 포옹한 건 경기 재개를 늦추려던 것이기도 했다.


결승전 준비 과정에서 지단을 막는 데 초점을 맞췄나?

우리는 모든 선수들의 모든 것에 관해 알고 있었다. 프랑스대표팀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해주는 전담 팀이 있었다. 심지어 화장실을 몇 번 가는지에 대해서도. 우린 리베리, 앙리, 말루다, 지단을 알았지만, 그들 역시 우리에 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체스 게임이었다.


결승 시작 7분 만에 당신이 페널티를 내줬는데?

그건 파울이 아니었다. 주심은 심지어 설명을 많이 하지도, 옐로카드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주심이 휘슬을 불고 페널티가 선언됐다. 다행히 우리가 빨리 동점을 만들 수 있었다.


당신의 골에 대해 기억해보자면?

헤르타베를린의 옛 구장에서 오전 훈련을 했다. 전후 시대인 것처럼 방치된 구장이었다. 세트피스 훈련을 하는데 파비오 칸나바로가 나더러 “봐, 파트리크 비에라가 널 무서워하고 있어. 그에게 달려 들라고”라고 말했다. 비에라를 상대하는 팁을 받았는데, 파비오가 옳았다. 나는 골을 넣고 어머니를 위해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녀에게 “당신 거예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머니와 나의 가족들을 위한 골이었다.


이후 연장전에서 지단과 충돌한다. 2006년 이후로 관련 질문을 계속 받았을 텐데, 그에 관한 기억은?

아직도 이 이야기인가? 이 질문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아니면 농담이 될 테니까. 내 책을 읽으시라. 거기에 모든 얘기가 다 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그 사건과 연결한다.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

나는 기억될 필요가 없다. 심지어 오늘까지 사람들은 내가 네스타 부상 덕에 월드컵에서 뛰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나는 경기에 뛰었고 두 골을 넣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기억한다. 나는 그들에게 답하지 않고, 그들도 내게 답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안다. 월드 챔피언이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질투는 사람들의 약점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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